하얼빈의 동흥학교<東興學校>, 어떤 학교인가?
1909년 4월, 하얼빈에 처음 세워진 조선인 학교다.
흑룡강성 에서도 조선인 사립학교로는 가장 일찍 설립된 학교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자녀교육을 매우 중시해 왔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지식이 없으면 눈뜬 소경이다”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자녀만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민족의 전통으로 자리집고 있다.
우리민족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는
“황금 백만 냥도 자식하나 가르침만 못하다”는 유묵을 남겨놓고 순국하였다.
때문에 그 시대 조선인 속에서는 “배워야 안다”는 구호가 나왔다.
동흥학교는 하얼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이주민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학교다.
특히 안중근 의사와 그의 동지인 김성옥, 김형재, 탁공규, 김성백과 함께 뜻을 모아 설립했다.
처음 이 학교는 校名(교명)을 <동흥학교>라 하고
학교청사는 부두구 외국3도가 47호(현재의 도리구 홍하가 39호)에 자리를 잡고
1909년 4월에 개교식을 가졌다.
이 학교는 학년제를 실시한 것이 아니라
한문과, 러시어과, 2개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고
수업과목은 한문, 한글, 러시아어 등 3개과목을 두었다.
학생은 한문과 8명, 러시아어과 20명으로 모두 28명이었다.
한문과 교원은 김형재, 조선어과 교원은 탁공규가 담임을 했다.
동흥학교는 교육기관이면서도 반일 애국사상 교육의 진지였다.
교원 김형재는 자택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숙식을 하고 월급을 받지 않고
조선인들에게 반일 애국주의 사상과 계몽교육에 정력을 기울였다.
탁공규는 나이 36세로 블라디보스톡에서 대동공보사 집금인으로 있으면서
반일단체인 청년회 부회장으로 반일활동을 하다가
하얼빈에 와서 약국을 차려 생계를 유지하면서 학교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다.
교장 김성옥은 러시아에 귀화한 인물로 그는 3년 전에 하얼빈에 와서 약국을 차렸다.
그는 49세로 나이도 많고 조선인 사회에서는 “잘 산다”고 평가를 받은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1909년 10월 하순, 안중근의사가 이또히로부미를 처단하러 하얼빈에 왔을 때
이 학교의 김형재를 찾아갔고
김성옥의 집에 모이기도 하면서 이 학교에서 거사를 계획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의 거사가 성공한 후
안중근의사는 주범으로 체포되고 동흥학교 교원인 김형재, 탁공규, 교주 김성옥은
공범으로 체포돼 이들 3명은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 지하실 감방에 갇혔다가
여순 감옥으로 압송이 되었다.
이후 동흥학교는 할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다.
이런 정황에서 한민회 회장인 김성백이 조선인들 집을 찾아다니며 설득을 해
12월 중순에 다시 학교 문을 열게 되었다.
이때부터 교주 김성옥대신 의사를 하고 있던 방사첨 에게 교주 직을 맏겼다.
1910년 1월 15일,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동흥학교는 학교라고 하지만 기실은 일종의 구락부로 반일단체의 소굴이다>라고 했다.
이로 보아 동흥학교는 반일사상 교육의 진지요. 반일활동의 진지였음을 알 수 있다.
동흥학교는 그 어떤 누구의 도움 없이 조선인 자체의 힘으로 꾸려 나갔다.
1916년 10월 6일, <원동보>의 보도에 의하면
“동흥학교는 확대가 되어 학생이 40여명이 되었고
저녁 야학에도 10여명이 모여 러시아어를 배웠다”고 했다.
학교교육은 우리 민족이 오늘의 민족정체성을 보존하는데 있어 많은 기여를 했다.
민족의 과거나 장래의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것은 교육에 달렸다.
때문에 시대와 더불어 세계무대에 나가서 활약해야 할 우리민족은
교육을 특별히 중시해야함을 우리민족이 걸어 온 역사가 시사해주고 있다.
이후 동흥학교는 10여차례 교명을 바꾸면서
현재는 도리조선족소학교로 하얼빈에 있으며
위 안성의 학교는 도리소학교 한국분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