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회(韓民會) 회장 김성백, 그는 누구인가?
할빈거주 조선인 70여명으로 한민회 창립
회장 김성백, 러시아 국적자로 통역관 맡아 조선인 도와
한민회(韓民會)는 중국 할빈시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이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부딪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민간자치제 조직이다. 1909년 7월 27일, 할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7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고 <한민회> 창립을 선포하였다. 회의에서는 할빈 조선사회의 유력자로 지목되는 김성백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김성백은 당시 32세였다. 두 살 때 부모의 손을 잡고 함경북도 종성읍을 떠나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이주해 갔다. 그는 러시아에 귀화하여 ‘치혼이바노비치 김’이라는 러시아 이름을 가졌고 러시아의 동방정교를 믿어 교회당에서 정식세례를 받았다.
김성백은 1907년 가을, 할빈에 이사 와 부두구 레스나야가28호(지금의 도리구 삼린가34호)의 러시아식 단층 목조건물에서 살았다. 김성백은 청부업자로서 동정 철도건설에 참여하였으며 러시아 통역까지 겸하고 있어 러시아 관헌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김성백은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슨 이유로 한민회 회장직을 맡았는가?”라는 러시아 관헌의 질문에 김성백은 “할빈을 찾아오는 조선인은 이곳의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거리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사정에 밝은 내가 회장에 취임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국적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민족, 같은 뿌리, 같은 핏줄이다. 동포들을 사랑하고 도와주려는 민족적 책임감에서 김성백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업에 전념하였다. 사실 한민회는 단체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조역도 없고 회비를 거두고 관리하는 부기가 있을 뿐 주로 김성백이 한민회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김성백은 할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권익을 대표하고 요구와 고난을 해결해주기 위해 힘썼다.
그는 할빈 에서 날로 늘어만 가는 동포들의 거처와 직업을 알선해주고 조선인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앞장서서 제일 많이 투자를 하였고 회원들을 동원하여 힘을 모아 조선인학교 <동흥학교>를 세워 후대의 교육문제도 해결하였다. 현재의 할빈도리조선족중심소학교인 동흥학교는 안중근 의사와 그의 동지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유명한 당시의 교육기관 이었다.
동포들 생계에 투자해 주면서 후대교육에도 앞장 서
러시아 관헌에게 토지 빌려 조선인 묘지도 설립
중국 할빈 에는 조선인들이 사망했을 때 일정한 묘지가 없어 임시로 파 묻은 곳이 자주 침수가 되고 개들이 무덤을 파 헤쳐 백골이 노출하는 일도 있어서 김성백은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토지를 빌려 조선인 묘지를 세움으로서 동포들이 사망했을 때 파묻을 곳을 해결하였다.
1909년 10월 22일, 민족영웅 안중근 의사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할빈에 도착했다. 그 일행인 안중근, 우덕순, 류동하 세 사람은 김성백의 집으로 찾아갔다. 류동하의 두 살 아래 여동생 류안나가 김성백의 넷째동생 김성기(러시아명 알렉산드르)와 약혼한 사이였다. 김성백의 셋째동생 김성엽은 수분하에 있는 류동하의 부친 류경집이 꾸린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다. 그러니 류동하와 김성백은 사돈 중에도 친한 사돈이었다. 그리고 김성백은 류경집의 집에서 안중근을 만난 적이 있고 안중근이 독립운동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김성백은 안중근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할빈 역에서 이또히로부미를 처단할 때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수분하 중국세관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던 정대호는 “조선에 가서 가족을 데리고 오는 길에 나의 가족도 같이 데려와 달라”는 안중근의 부탁을 받고 자기식구 6명 외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와 각 2살, 4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할빈에 도착하여 김성백의 집에 들었다. 때는 10월 27일, 바로 안중근이 거사한 다음날로 체포가 되었기에 서로 만나볼 수 없었다. 정대호는 체포가 돼 안중근과 같이 여순에 압송되고 정대호 세 식구와 안중근의 처자 세 식구는 11월 22일, 할빈을 떠나 수분하에 갈 때까지 줄곧 김성백의 집에 묵으면서 많은 신세를 졌다.
사람들은 김성백의 집을 가리켜 언제나 사람이 모여드는 집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그의 인품이 후덕했다. 안중근의 동지였던 우덕순은 8.15 해방 후 서울에 돌아가 쓴 회고록에서 “김성백은 우리와 같이 한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지사”라고 했다. 김성백은 또 비밀 항일 지하조직인 <대한국민회 만주리아총회>회장의 직책도 맡고 있었다. 만주리아총회는 할빈시, 석두하자, 횡도하자, 목릉, 하이랄, 삼성(지금의 의란) 등 지방분회를 이끌었다.
안중근 의사 이또히로부미 암살에 기여한 최고의 공로자
후덕한 인품으로 안중근 의사 가족 및 애국동지 가족들 도와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에서 일본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 할빈의 <한민회>는 “정상적으로 반일사상을 선동하는 중심”이라고 했고 회장 김성백은 “반일과 한인들의 수령”이라고 했다. 이 같은 사실로 보아 김성백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성백의 애국 독립사상과 그 활동은 할빈 주재 일본총령사관 경관들의 은밀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주재 일본대사 모또노가 러시아 외무성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만주에 있는 안태근과 안경근, 김성, 김성백 형제, 그리고 중국신문 원동보 특파원 문태석의 반일활동에 대항하는 방책을 취하겠다”는 청원서와 함께 외교문서가 아직까지 보관돼 있다. 이 외교문서는 김성백의 반일 할동과 일본정부의 감시를 증명해준다.
김성백은 처음 레스나야가 28호 러시아식 단층목조 집에서 살다가 1912년에 시얼커프왕작가에 이사를 왔다.(지금의 지단가 40호) 2층 벽돌집에 상하층 10여 칸 되는 집에 살았으며 출타를 할 때는 자기 마차를 타고 다녔다. 그는 조선인 사회는 물론 러시아, 중국 사람들 가운데서도 일정한 지명도가 있는 사람으로서 할빈에서 생활기반을 튼튼히 닦았다. 그러나 일본경찰과 헌병들의 감시가 심하고 반일 할동을 하기가 힘들어서 1917년 봄 김성백 일가는 할빈을 떠나 러시아 이루크츠크로 이주해 갔다.
김성백의 동생인 김성옥(동흥학교 교주)